1980년대, 북한은 식량난 해결과 농업 생산력 증대를 목표로 야심 찬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서해갑문 건설입니다.
농지 확장과 서해갑문의 등장
1960년대부터 북한은 서해안 일대에서 대규모 간척사업을 진행하며 갯벌을 농지로 전환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농지를 확보한 대가로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물 부족 현상이었죠. 대동강과 청천강 사이 100km에 이르는 지역에 큰 강이 없어 물을 끌어오는 것이 어려웠고, 서해안 특유의 조수 간만 차로 인해 물이 들어왔다가 빠지는 상황이 반복되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상된 것이 바로 서해갑문이었습니다. 대동강 하구에서 서해로 이어지는 길목에 7.8km 길이의 방조제를 건설해 물길을 조절하고, 이를 통해 다음과 같은 효과를 기대했습니다:
- 서해안 일대 농지에 물 공급
- 평양 근처 농지 보호
- 수량 확보를 통한 전력 생산
- 남포와 황해남도를 연결하는 도로 구축
계획대로라면 서해갑문은 농업과 산업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북한 내부에 이를 실현할 기술력이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소련의 반대와 북한의 독자 추진
북한은 소련에 기술 지원을 요청하며 현물로 대가를 지급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현장을 검토한 소련 기술자들은 “장기적으로 보면 손해가 크니, 이 사업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단호히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접한 김정일은 소련의 반대를 “북한의 기술 발전을 막으려는 의도”로 해석하며 독자 추진을 주장했고, 김일성 역시 이를 수용해 사업을 강행했습니다.
무리한 공사와 희생
서해갑문 건설은 북한 역사상 최대 규모의 토목 공사로, 김일성은 이를 단 3년 만에 완성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기술력 부족을 인력으로 메우기 위해 군인 20만 명과 수많은 노동자가 투입되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 하루에 적게는 2~3명, 많게는 7명씩 사망
- 공사 기간 동안 사망자는 수천 명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두 번의 공사 기간 연기를 거쳐 1986년, 계획보다 2년 늦게 서해갑문이 완공되었습니다. 참고로 김일성의 초상화로 잘 알려진 사진 중 하나는 바로 이 서해갑문 준공식에서 촬영된 것입니다.
완공 후의 문제점
완공된 서해갑문은 부실공사의 대표 사례로 남았습니다.
- 구조적 문제: 방조제 곳곳에서 물이 새어 들어오는 문제가 발생했으며, 유지보수를 위해 육군 사단이 상시 대기 중입니다.
- 농업 피해: 대동강 유역의 기후 변화로 농업 생산량이 감소했습니다.
- 어업 피해: 방조제로 물길이 막히면서 대동강 하구의 숭어 어획량이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 전력 생산 실패: 완공을 서두르며 계획된 발전소 건설이 무산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서해갑문은 애초의 목표를 하나도 달성하지 못한 채 북한 경제의 '애물단지'로 전락했습니다.
막대한 비용과 자화자찬
서해갑문 건설에 투입된 비용은 무려 40~60억 달러로, 당시 북한 GDP의 30%에 해당했습니다.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16~18조 원에 이르는 막대한 금액이 투입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농업과 어업 생산량 감소, 전력 생산 실패라는 참담한 성적표였지만, 북한은 이를 “20세기의 기적”이라고 자화자찬했습니다.
“공업이 발전된 나라들도 수십 년, 아니 몇 세기에 걸쳐야 할 대단한 건축물”이라는 자부심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북한 경제에 깊은 상처를 남긴 실패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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